석란정

[스크랩] 나는 담배올시다.

지슬의 세계 2015. 1. 30. 17:06

 

나는 담배올시다.

 

지슬 박경남

 

 

한집에서 태어난 수많은 친구 가운데

오직 스무 형제만이 한 갑이라는 포장으로 한 운명이 되었습니다.

깔끔하고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정갈한 은박지로 온몸을 휘감고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옷으로 치장한 나는 당신의 간택을 받았지요.

 

이 세상에 새것으로 태어나 귀하지 않은 것이 없지마는

다른 그 어떤 것들보다 더 애지중지 귀한 대접받으며

쥐면 꺾일세라 놓으면 날아갈세라 비가 오면 젖을세라

당신은 세상에 없는 귀한 물건인양 나를 손에도 들고 다니기도 했지만

당신은 나를 고이고이 품 안에 넣어두기를 좋아했지요.

어떤 친구들은 아리따운 여인들의 핸드백 속에서

귀인 대접을 받았다고들 합니다.

 

당신은 내게 뜨거운 정열을 바라고 내 몸에 시뻘건 불을 붙여

내 몸을 태워 즐기며 뜨거운 입술을 내게 보내었고

나는 당신의 입맞춤에 내 몸을 사르며

당신이 내게 보여준 애정에 보답했습니다.

내 몸은 하얀 재를 남기며 연기되어 사그라지고 작아졌습니다.

꽁초가 된 내 모습은 나 자신조차도 보기 흉할 정도로 볼품없어지고

당신의 손이 데일 만큼 작아졌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그러나... 그러나

그렇게 사랑했던 나를 당신은 아무런 생각 없이

석별의 여운도 나눌 틈조차 가질 수 없이

손가락에 퉁겨버려 져

어떤 친구는 하수구에 떨어져 오물을 뒤집어쓰고

또 어떤 친구는 당신의 발아래 밟혀 짓이겨져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고

어떤 친구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돌담 틈새에 끼어

흉측한 모습으로 구겨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대접받는  친구들은 재떨이라는 곳에 고이 모셔지기도 하였지요.

 

한 갑이라는 스무 형제는 어느 곳으로 갔는지 알 수 없고

같은 곳에서 태어났던 이름 모를 친구들이 군데군데 모여

서로의 아픔을 이야기합니다.

귀한 대접 받았던 것을 추억하며 아무리 몸부림쳐 보지만

우리는 생명이 다해 버려진 담배꽁초일 뿐입니다.

 

사람들은 얘기들 하지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은 잊혀진 사람이라고

당신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나를 생각이나 할까요?

아니면 또 다른 나의 친구들을 품안에 넣고 다니며 농락하는가요?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의 품속에 자리 잡았던 것이 그립습니다

 

나는 당신의 사랑을 한몸에 받았던 담배올시다...

 

출처 : 석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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