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할아버지 되던 날[수필, 삶의 이야기]
할아버지 되던 날
맞벌이하는 우리 내외는 쉬는 날을 맞추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나야 자유로운 직업을 가지고 있어 시간 내기가 쉽지만, 아내는 자신의 일을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인지라 월차를 쓴다거나 연차를 쓰는 일은 집안의 대소사가 아니고서는 거의 쓰지 않는다.
모처럼 아내와 쉬는 날이 같아 어디 여행이라도 갈까? 생각하다가 이상하게 우리 부부는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딸아이가 출산일을 일주일이 지났기에 마음이 쓰였지 모르겠다.
이 궁리 저 궁리 하다가 결국은 가까운 광교산 수변 산책로를 걷기로 하고 집에서 출발하여 광교 공원을 따라 저수지 길로 접어드는 때에 전화벨이 울렸다. 딸아이의 다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온다. 아무래도 아기를 낳으려는 것 같이 배가 아파 병원에 가니 엄마, 아빠 빨리 좀 와달라고 했다.
제 신랑도 있지만 얼마나 다급했는지 짐작이 갔다. 아내와 나는 역시 사람의 예감이 틀리는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하면서 차를 급히 딸네 집 근처에 있는 병원으로 몰아갔다. 도착해 보니 진통은 시작했고 사위는 딸아이의 손을 잡고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모습이 그래도 정다워 보이는 게 보기 좋았다.
막내아들은 제 누나가 아기를 낳는다는 소식을 듣고 단숨에 달려왔고 집안일에는 무관심이었던 큰아들도 어떻게 됐느냐고 전화로 물어보면서 바쁜 일 끝났으니까 바로 내려오겠다고 연락을 해 왔다. 아이들 셋을 키울 때는 힘들어했지만 이런 큰일을 앞에 두고 자식들이 곁에 있으니 든든한 마음이 들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진통은 점심시간을 지나 저녁 시간을 눈앞에 두고 있는데도 아기는 나오지 않고 딸아이는 힘들어 하는 것이 너무 안쓰러웠다. 아내도 첫 아이 낳을 때도 19시간의 진통 끝에 출산했던지라 제 엄마 닮아서 그런 것이라 이야기하며 딸아이를 달래고 있었지만, 아내가 아기를 낳는 것보다 딸아이가 아기를 낳는 것을 보는 마음은 천지 차이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조바심에 입맛도 없고 해서 점심도 거르고 있던 터라 아내와 저녁을 먹으러 나가는데 사위가 복도 한쪽 끝에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자기 때문에 제 아내가 아파한다는 생각에 미안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해서 눈물이 난다고 했다. 가진 것 없지만 그래도 마음 씀씀이가 착한 사람이 돼서 그런 생각한다는 게 장인 입장에서는 대견하고 기특하였다.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하니까 은지가 저렇게 힘들어하는데 혼자 밥 먹으러 간다는 게 내키지 않는다며 어머니 아버지 식사하고 오시라고 했다.
식사하며 아내와 우리의 신혼 때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무 볼품없고 가진 것 없이 그저 믿음 하나로 선택하여 시작한 우리 신혼살림은 참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병원으로 들어갔지만 아이는 아직도 산통을 계속하고 있었고 사위는 수술하면 어떻겠냐고 조심스레 물어 왔다. 엄살이 워낙 심한 딸아이여서 조금만 더 참아 보라고 했더니 엄마·아빠 나 죽을 것 같아 나 좀 살려줘 하는데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의사 선생님과 상의해 보자고 하고 면담을 신청했더니 조금만 더 기다려 보다가 정히 안 되면 수술을 하자고 하기에 산모가 너무 힘들어하니 기왕에 수술할 것 같으면 지금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럼 수술준비를 해야 하니까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곧바로 수술실로 들어갔다.
수술실로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 수술은 끝났고 건장한(4.25kg) 사내아이를 데리고 나왔다. 담당 의사선생님 말씀으로는 아이가 커봐야 2kg 남짓할 거라는 말이 있었는데 이게 어찌 된 일이냐고 했더니 병원장이 나와서 아기의 두상을 초음파로 측정했을 때는 그렇게 계산할 수밖에 없었다고 하면서 저희의 잘못이니 이해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아무튼, 별 탈 없이 아기를 낳았으니 수고했다는 말을 했지만, 병원 측에서는 보통 눈치를 살피는 것이 아니었다. 출산하고 산후조리원이 없어서 다른 조리원으로 가기로 예약을 했는데 병원에서는 수습차원에서였는지 자기네 조리원에 자리를 장만해주겠다고 했다. 아마 컴플레인을 예상하고 있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건강하고 튼튼한 손주 녀석이 태어났으니 2012년 3월 14일 오늘은 우리 부부가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 경사스러운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