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주선생묘
경기도 기념물 제1호.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곡로(능원리)에 있다. 1392년(공양왕 4) 순절한 뒤 풍덕군 공동묘지에 묘를 썼으나, 뒤에 태종의 명으로 고향인 경북 영천으로 묘를 옮기기로 하고, 이장하던 중 그 행렬이 용인시 수지면 풍덕천리에 이르렀을 때, 앞의 명정(銘旌)이 회바람에 날아가 지금 묘소의 위치에 떨어져 이곳에 명당인 것을 알고 안장하였다고 한다.
묘역 입구의 신도비는 1696년(숙종 22)에 건립된 것으로, 송시열이 찬(撰)하고 김수항이 글을 썼으며, 정몽주의 충절과 높은 학식에 대하여 쓰여져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역안내도
정몽주 묘역 좌우에 영일정씨와 연안이씨 일가의 묘역이 분포되어 있다.
홍살문 넘어로 묘역과 건물들이 고즈넉하게 보인다.
홍살문은 국가에서 효자孝子, 충인忠臣. 열녀烈女들이 살던 마을 입구 또는 살던 집앞에 그 행실을 널리 알리고 본받도록 하기 위하여 세운 붉은 문으로 홍문紅門.홍살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단분으로 묘비, 문인석 1쌍, 상석, 곡담 등은 종전의 것이 남아 전해져 왔다. 그런데 1972년 5월 문화재로 지정된 후, 같은 해 12월 종전의 상석이 지금의 것으로 교체되어, 원형이 일부 훼손되었다.
1974년 12월 곡담을 보수하면서, 장명등, 망주석, 석양, 호석, 난간석, 그리고 별도의 새로운 문인석 1쌍 등이 추가, 설치되었다.
묘비는 1517년(중종 12) 묘를 수축할 때 세운 것으로, 비에는 두 왕조를 섬기지 않은 뜻을 기리기 위해, 고려시대의 벼슬만을 쓰고 조선왕조 때 주어진 시호를 기록하지 않았다.
우리나리 묘역에서는 보기 힘든 연못으로 음양의 이치에 따라 가운데 섬을 두었으나 연지의 모양이 정방형이 아니라 삼각형인 점이 특이하다.
재미있는 일화로 이곳이 명당임을 알게 된 정몽주의 손녀는 친정보다는 시댁과 자손들이 더욱 번창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밤새워 연지의 물을 퍼 다가 이 자리에 뿌렸는데,
다음 날 묏자리를 파보니 물이 많이 나와서 정몽주의 후손들은 옆에 있는 지금의 정몽주 묏자리로 바꾸었다는 전설이 내려옵니다.
그 덕분인지 이석형의 연안이씨(延安李氏) 가문은 번창하여 후손들은 수많은 벼슬을 하게 되며 달성 서씨(達成徐氏), 광산 김씨(光山金氏)와 더불어 조선의 3대 명문 가문이 되었지만,
정작 정몽주의 후손들은 그다지 번성하지 못하였다고 전합니다.
정몽주선생의 어머니가 쓴 백로가이다 세상의 어지러움 속에서도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가르침이 깊다.
이방원의 회유의 글에 대한 포은선생의 굳은 결심을 나타내고 있다.
포은 정몽주선생의 묘소 뒷편에서 바라다 보이는 전경이 단아하다.
유명인의 묘소를 그리 많이 다녀보지 못했지만 여기서는 특이하게 차일석(차일을 칠때 끈을 묶을 수 있게 만든 돌)이 눈에 띄었다. 네 귀탱이에 심겨져 있다.
제사를 지낼때 제주의 손을 씼는 곳이라고 한다. 이것도 여기서 처음 보았다.성경에 나타난 물두멍이 생각났다.
태종은 정몽주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영원한 충신으로도 만들었다.
후손도 멸하지 않았으며 영의정으로 추증하였고 사패지로 240만평의 땅을 하사했다고 한다.
홍살문[紅箭門]을 지나면, 제사와 증시(贈諡) 등을 담당하던 영모재(永慕齋)와 관리사인 경모사(敬慕舍)가 있으며,
영모재(永慕齋) 편액은 우암 송시열의 글씨로 알려져 있다.
재실(齋室)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규모로 1980년에 보수를 위해 해체되었으며, 1995년에 중수되었는데,
재실(齋室)과 고직사(庫直舍)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며, '강당(講堂)'이라고 적힌 편액(扁額)이 걸려 있는 것으로 보아,
제사 기능 외에 학문을 위한 장소로도 이용되었던 것으로 사료된다.
곡담을 돌로 쌓는 형태는 왕능에서나 볼 수 있는데 정몽주선생의 묘에서도 볼 수 있는 것은 태종 이방원이 조선을 바로세우고자 하는 정신을 볼 수 있다. 비록 조선 건국을 찬성하지 않아 부하들을 시켜 선죽교에서 타살하기는 했지만 조선의 누구든 나라에 충성하면 이만큼 대우를 받을수 있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