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적문화답사

청령포

지슬의 세계 2017. 5. 7. 01:01

영월 청령포는 평창강이 굽어 돌아나가며 삼면이 물길이고 뒤는 산으로 막혀있는 지형이다.

세조는 어떻게 여기 이런 땅이 있는 줄 알고 단종을 유배 보냈을까?

건국이후 조선 정부는 전국적 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각도의 지리지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지리서는 지형, 특산, 인물 등 정보를 수록한 인문지리서에 해당된다.

세종대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세종실록에 수록되어 있어서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부른다.-가 편찬되었고, 성종대에는 팔도지리지가 부족하였던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단종이 유배되던 때가 세조 2년이니까 각도지리지의 편찬을 통하여 전국의 지역적 특성과 지형을 중앙조정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척박한 외지를 단종의 귀양지로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아들인 수양대군이 손자인 단종을 유배 보내는데 그 지리지가 이용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이 하는 일이란 참 모를 일이다.

세조는 꼭 단종을 죽여야만 했을까?

 

단종은 아버지인 문종이 일찍 죽자, 불과 12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문종의 유언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등이 어린 왕을 에워싸고 정사를 좌지우지하자숙부(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이 "이씨 나라를 다른 씨에 넘겨줄 수 없다"는 명분으로 반정反政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리고 스스로 이되니 이가 곧 세조인데

성삼문, 박팽년등 四肉臣등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이에 연류 된 모든 이들이 처단되고 단종은 '魯山君(노산군)"으로 격하되어 이 영월 땅에 유배되었는데, 당시 단종문제로 수양대군과 알력을 빚어 지방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또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그는 처단되고, 세조는 그래도 단종의 목숨은 부지시키려 하였으나 정난 일등공신 한명회 등이  단종을 살려두면 계속해서 복위운동이 이어질 것 이라면서 죽일 것을 강력히 주장해 유배지인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꽃다운 17세에 붕어했다.


밀납인형이기는 하지만 왕으로서의 품위를 보는 듯 근엄하다.


행랑채

당시 궁녀들과 관노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담장 넘어에 있던 소나무가 단종의 서러움을 아는 듯 허리를 숙여 배하는 것 같다.

단종이 청령포로 귀향와 두달을 기거하다 홍수로 인해 더 이상 기거하지 못하고 관풍헌으로 자리를 옮겨 기거하였다. 




관음송은 역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후대의 임금들도 단종의 아픔을 아는지 그의 유적을 지켜 보호하려 한것을 알 수 있다.



인적이 끊긴 어소는 적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