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령포
영월 청령포는 평창강이 굽어 돌아나가며 삼면이 물길이고 뒤는 산으로 막혀있는 지형이다.
세조는 어떻게 여기 이런 땅이 있는 줄 알고 단종을 유배 보냈을까?
건국이후 조선 정부는 전국적 통치에 필요한 자료를 확보하기 위해 각도의 지리지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이때의 지리서는 지형, 특산, 인물 등 정보를 수록한 인문지리서에 해당된다.
세종대에는 ‘팔도지리지(八道地理志)’-세종실록에 수록되어 있어서 ‘세종실록지리지’라고도 부른다.-가 편찬되었고, 성종대에는 ‘팔도지리지’가 부족하였던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을 편찬하기에 이른다.
단종이 유배되던 때가 세조 2년이니까 각도지리지의 편찬을 통하여 전국의 지역적 특성과 지형을 중앙조정에서 이미 파악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척박한 외지를 단종의 귀양지로 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은 아들인 수양대군이 손자인 단종을 유배 보내는데 그 지리지가 이용되리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이 하는 일이란 참 모를 일이다.
세조는 꼭 단종을 죽여야만 했을까?
단종은 아버지인 문종이 일찍 죽자, 불과 12세에 왕위에 올랐는데 당시 문종의 유언을 받은 김종서, 황보인등이 어린 왕을 에워싸고 정사를 좌지우지하자, 숙부(작은 아버지)인 수양대군이 "이씨 나라를 다른 씨에 넘겨줄 수 없다"는 명분으로 반정反政을 일으켜 조카인 단종을 상왕上王으로 올리고 스스로 王이되니 이가 곧 세조인데,
성삼문, 박팽년등 四肉臣등이 단종복위를 도모하다 발각되어 이에 연류 된 모든 이들이 처단되고 단종은 '魯山君(노산군)"으로 격하되어 이 영월 땅에 유배되었는데, 당시 단종문제로 수양대군과 알력을 빚어 지방으로 유배된 금성대군이 유배지에서 또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 이 역시 사전에 발각되어 그는 처단되고, 세조는 그래도 단종의 목숨은 부지시키려 하였으나 정난 일등공신 한명회 등이 단종을 살려두면 계속해서 복위운동이 이어질 것 이라면서 죽일 것을 강력히 주장해 유배지인 이곳에서 사약을 받고 꽃다운 17세에 붕어했다.
밀납인형이기는 하지만 왕으로서의 품위를 보는 듯 근엄하다.
행랑채
당시 궁녀들과 관노들이 기거하던 곳이다
담장 넘어에 있던 소나무가 단종의 서러움을 아는 듯 허리를 숙여 배하는 것 같다.
단종이 청령포로 귀향와 두달을 기거하다 홍수로 인해 더 이상 기거하지 못하고 관풍헌으로 자리를 옮겨 기거하였다.
관음송은 역사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리라.
후대의 임금들도 단종의 아픔을 아는지 그의 유적을 지켜 보호하려 한것을 알 수 있다.
인적이 끊긴 어소는 적막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