융릉隆陵
융릉隆陵
추존 장조와 헌경의황후의 합장릉
장조莊祖(1735~1762)는 제 21대 영조의 둘째 아들이자 제22대 정조의 생부生父이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고 서예와 무예에 뛰어났으나 영조를 대신하여 정치업무(대리정치)를 보게 되면서 노론과 마찰을 빚게되었고, 나경언의 고변으로 결국 뒤주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재실이다. 마치 사대부집같이 단아한 것 같다.
금천교를 지나면 홍살문이 보인다
혜경궁 홍씨는 사도세자와 동갑이었다. 사도세자가 28세에 죽었으니 그야말로 청상과부였다.
정조가 능 참배를 하면서 모시고 다녔던 혜경궁 홍씨는 홍살문 너머 사도세자의 능머리가 보이면 가슴이 답답하고 현기증을 느껴 혼절하곤 했다고 한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은 아녀자의 고통을 상상할 수 있으리라.
정자각 안에는 제향때 진설되는 음식들을 사진으로 전시해 놓았다.
1762년 영조는 28세 나이에 죽은 세자를 슬퍼하면서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렸다.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즉위하자 존호를 장헌으로 올렸고 고종이 조선을 제국으로 선포하며 1900년(광무4)에 장조로 추존하였다.
헌경의황후獻敬懿皇后(1735~1815, 혜경궁홍씨)는 영의정 영풍부원군 홍봉한의 딸로 1744년 (영조 20)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 사도세자가 세상을 뜬 후 혜빈, 정조 즉위 후에 공호를 혜경으로 올렸다. 혜경궁 홍씨의 자전적 회고록이자 궁중문학의 백미라고 평가받는 『한중록』을 남겼다.
혜경궁 홍씨도 1900(광무 4)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되면서 헌경의황후로 추존되었다.
융건릉을 답사하면서 느낀 것은 가까이서 볼 수 없다는 것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구경을 하라고 만들어 놓았다면 가까이서 보면서 그 가치와 주는 교훈을 느끼게 하는게 더 좋을 듯 하다. 만들어 놓고 가까이 하지 못하게 하는게 능을 관리하기에 좋기는 하겠지만 실효성을 따진다면 결코 바람직한 것은 아닐 것이다.
더 가까이가서 촬영하고 싶었으나 가지 못하니 250m/m로 당겨 촬영했다.
능안을 촬영하려면 학술단체같은 곳에서 능을 관할하는 곳에 허락을 받아 관리인 입회하에 단 10분 촬영의 기회를 준다고 한다.
가까이서 보면 우리나라 능의 흐름을 더 잘 알 수 있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았다.
비문각 안에는 두개의 비문이 있다.
안에 내용을 설명해주는 안내문이 있어 그나마 보기 좋았다.
1900년(광무 4)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장조까지 황제로 선포하였다.
현릉원의 비석은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가 찬하였다. 1789년(정조 13) 양주 배봉산 (지금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있던 영우원을 지금의 자리로 옮기고 현륭원이라 고쳐 불렀다.
홍살문을 지나면 좌우에 수라간과 수복방이 있는게 정상이나 융능에는 수복방 밖에 없다.
수라간 : 예전
수복방 : 수복방(守僕房)은 종묘 정전의 동문 담장에 잇대어 있는 건물로 종묘를 지키는 사람들이 거처했다. 『춘관통고』에는 ‘소차방(小次房)’, 일제 시기에는 ‘수복청(守僕廳)’이라 일컬었다.
우리나라 왕릉에서 보기드문 원형 연못인 곤신지가 있다.
원형 연못은 용의 여의주를 상징하는 것으로 아버지를 연모했던 정조의 마음을 엿볼 수 있다.
- 『정조실록』 1792년(정조 16) 윤 4월 7일의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장용영(壯勇營)의 돈 4만 냥을 경기 감영에 꿔주어 현륭원(顯隆園) 화소(火巢) 안에 있는 백성들의 전답 값을 보상해주고 그 나머지로는 임금이 행차할 때 외탕고(外帑庫)의 경비 및 나무 심는 비용으로 쓰도록 하였다.
그만큼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인 현륭원 조성에 있어서 일반 백성들에게 조금도 피해가 가지 않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