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이 깊은 우물.
샘이 깊은 우물.
은하선생님의 가난한 우물이라는 글을 보니 나도 생각나는 우물이 있다.
내 고향이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내 어릴 적은 경기도 양주군에 속해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1963년에 서울로 편입 되었다고 알고 있는데 인터넷을 아무리 찾아보고 구청에 지명 역사에서 아무리 찾아봐도 정확한 정보는 찾아보기 힘들다. 내 기억도 정확한 것은 아니어서 주장할 것은 못되지만 아마 초등학교, 그러니까 그때의 국민학교 3학년 때인가?부터 주소를 서울특별시 성북구 미아동으로 썼던 기억이 있다.
우리 동네는 앞으로는 삼양동 빨래 골 계곡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과 우이동 계곡에서 내려오는 양 갈래 사이의 동네여서 기름진 옥토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의 편만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논에 미꾸라지가 많아서 못자리를 할 때던가. 모를 심을 때보면 항상 철엽 국을 끓이는 솥을 걸어 놓고, 일이 끝나면 어른들은 일하면서 잡은 미꾸라지로 추어탕을 만들어 드셨기에 우리도 덩달아 통 미꾸라지 탕을 맛볼 수 있었다.
동네 양쪽으로 그리 크지는 않았지만 개울이 흐르고 있어서인지 우물을 조금만 파도 깨끗한 물이 나와 물의 아쉬움을 모르고 살았다. 단지 큰물이 없어서 내겐 수영을 배우지 못한 아쉬움은 지금껏 남아 있다. 오늘도 아내와 수영장을 갖다 왔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란 개헤엄을 치거나 물에서 걸어 다니는 것이 전부이다. 또 팔불출 같은 자랑이지만 아내는 초등학교시절 수영선수였기에 수영을 잘한다. 연애시절엔 교회청년들과 겨루며 여주 강을 헤엄쳐 건넜던 기록이 있다.
이것이 이글에 중요 내용은 아니니까 대충 넘어가기로 하고,
그렇게 물이 흔한 지역 이였음에도 건너 마을에는 언제 팠는지 모를 아주 깊은 우물이 있다.
두레박질을 해도 어린 나이였지만 열 번 이상을 긴 팔질을 해야 겨우 두레박을 잡을 수 있었으니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물이 그렇게 깊다 보니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물이 마를 날이 없었고, 또 특이한 것은 그렇게 깊은 우물인데도 소나기가 내리고 무지개가 뜨면 그 깊은 우물에서 무지개가 보인다고 어른들은 말씀하셨지만 실상 무지개가 떴을 때 그것을 보려고 뛰어가다 보면 어느새 무지개가 사라져 한 번도 보지는 못했다.
어른들 말씀에 그 우물에 무지개가 보이는 해에는 풍년이 든다고 하였었는데, 무지개를 보았다는 소문이 돌면 진짜로 풍년이 들어 동네 사람들의 즐거움이 컸었다.
이렇게 더운 여름날 아버지는 주전자를 가지고 가서 그곳 우물물을 떠 오라고 심부름을 시키셔서 물을 담아 오면 주전자 겉으로 물방울이 맺힐 정도로 차가와 지금의 냉장고에서 꺼낸 물처럼 시원한 맛을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우물이 깊고 시원하다 보니 주변에 사는 사람들은 김치 통을 줄에 매달아 내려놓고 신선한 김치를 맛보았고 수박 같은 과일들도 지금의 냉장고와 같이 넣어두기도 했다.
악동으로 소문난 우리들은 가끔 우물에 달아 내린 과일들을 훔쳐 먹기도 한 기억이 있다.
그래도 서울이라고 얼마 안 있다 지금의 신도시처럼 개발 붐이 불기 시작해서 집들이 들어서고 사람들이 들어오면서부터 수도가 들어와서 우물물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점차 사라졌고, 사용하지 않게 되다 보니 결국 물이 오염되기 시작했지만 그 동네에 오래 산 사람들이 아니고는 거의 신경을 쓰지 않아 결국엔 쓰레기로 채워지고 악취가 심하게 났었다. 종말엔 어린아이가 빠져 죽는 바람에 흙으로 메워버리고 말았다.
아련한 추억의 한 페이지지만 지금 이 글을 쓰는 시간에도 무지개가 뜨면 그 무지개를 보려고 논길을 따라 내 달리던 어린 나를 본다.
서서 울 곳이 없는 동네가 서울이라곤 하지만, 그래도 서울은 내 고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