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명윤 밀양박씨 충렬각-화성시 향토유적 제5호
겨울같지 않은 겨울 날씨는 흐리지만 따뚯한 일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답사.
조선시대 충신 한명윤과 그의 부인 밀양 박씨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충신, 열녀문.
조선 중기의 문신. 자(字)는 회숙(晦叔)이고, 부호군공(副護軍公 : )의 아들로 부사공 수정(府事公 : 守貞)의 손자이며 어머니는 숙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니 교위 창신(校尉: 彰信)의 따님이시다. 선조 1년(1568)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추천에 의하여 연은전 참봉(延恩殿 參奉)이 되었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동왕 23년 영동현감으로 부임하여 치적(治迹 : 백성을 다스린 성적)을 올렸다.
동왕(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동에서 의병을 모아 용전(勇戰 : 용감하게 싸움)하여 전공(戰功 : 싸움에서 이겨서 세운 공로)을 세우니 조정에서 그 충용(忠勇 : 충성스럽고 용맹함)을 가상히 여겨 품계(品階 : 직품과 관직의 등급)를 올려주고, 조방장(助防將)을 겸하게 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의 전 국토가 전화(戰禍)를 입은 상태였는데, 영동 현감 한명윤은 백성들을 안심시키며 고을을 굳게 지켰으며 적의 침입을 막아내어 화를 면하였다고 합니다. 1593년에는 한명윤이 상주 목사로 임명되어 왜적 토벌에 전념하다가 10월에 전사하였다
동왕26년 상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여 왜적과의 전투(戰鬪)에서 전사하자 가선대부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에 증직하고 배위 밀양 박씨도 순절(殉節 :임금이나 남편의 죽음에 따라 자살함)하니 선조(宣祖)는 공과 부인의 정려(旌閭 :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살던 고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함)을 세우도록 명하여 고향에 충신문(忠臣門)과 열녀문(烈女門)이 세워졌다.
한명윤의 처 밀양 박씨는 적이 당도했다는 소식을 듣고 절개를 지키고자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한명윤의 공과 밀양 박씨의 절개를 기리기 위해 충신 정려와 열녀 정려를 하사하였다
남편은 충신으로 부인은 열녀로 정려한 예가 그리 흔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