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란정

[스크랩] 첫눈 내리던 날의 추억

지슬의 세계 2015. 1. 31. 13:07

첫눈 내리던 날의 추억

 

  엊저녁서부터 내리던 비는 새벽녘에 이르러서는 눈으로 변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 골목길에 주차되어있는 자동차 위엔 제법 눈이 쌓여 있었다.

 

  김장한다고 며칠 전부터 말한 아내는 늦게까지 일하고 온 남편 깰세라 조심조심 발걸음을 옮기는 것을 느낀 시간은 항상 내가 일어나는 시간이었다.

벌써 깍두기며 달랑 무를 썰고 다듬어 소금에 절여 놓고 시장을 조금 더 봐야겠다고 아내가 나가는 문 뒤로 많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아련히 떠오르는 생각들.

나는 중학교밖에 졸업하지 못했다. 내 아버지가 돈을 버실 줄 몰라서가 아니라. 좋은 기술(우리 아버님은 한옥을 짓는 대목이시다)을 가지고 계셨으면서도 너무 욕심이 없으셔서 남들이 일이 없어서 일을 좀 달라고 하시면 그 자리를 양보해주곤 하시기에 돈 벌 자리가 없으셨다. 아버님 열 살 때 할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기에 아버지는 13남매의 생계를 위해서 일본 사람이 운영하는 목공소에서 잔심부름하시며 목공 일을 배우시게 되었고 일제 말년과 6.25 동족상잔 때는 군인들의 막사를 지어주는 일을 도맡아 하셨다. 그러셨기에 일에 대해 너무 지쳐계시지 않으셨는지 모르겠다.

 

  중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나는 철공소에서 일을 배우게 되었고, 그런 일을 하는 사람들은 의례 일이 끝나면 술을 즐겨 마셨다. 나도 그 부류에 끼어들어 술을 즐기게 되었는데 체질적으로 술을 많이 먹는 기질을 타고났는지 한 가지 술만 먹어서는 취하지 않았다. 우리 형제들이 모이면 늘 하는 얘기가 “술을 못 마시는 사람은 박 씨가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술고래 집안이다.

그러니 자연히 술을 많이 먹는 친구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밤새도록 술을 먹다가 날이 밝기가 부지기수였다.

 

  친구들과 술을 마시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그때 친구들의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그것은 같이 술을 마시다가 안 마신다고 빼는 친구들에게는 옷에다 술을 붓는 이상한 나름의 습성이 있었다.

이리저리 떠돌다 20대 초반에 인천 부평에서 일하게 되었다. 12월 초반 일을 끝내고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고 있는데 한 친구가 술이 안 받는다고 못 마시겠다고 빼고 있었다. 우리 친구들의 못된 습성이 나타났다. 마시지 않겠다고 하던 친구의 옷에 술을 부었더니 이 친구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나가더니 감감무소식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는 그 친구로 안주 삼아 더 많은 술을 마시게 되었고 밤은 깊어 갔다.

 

  그때는 통행금지가 있어서 12시가 다 된 시간에 술집을 나왔다. 첫눈치고는 많은 양의 눈이 내리고 있었다. 만취가 되어 비틀거리며 기숙사로 향해 가는 길에 웬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는 사람이 눈에 띄었다. 이렇게 눈이 내리고 추운 날에 길에 쓰러져 있으면 ‘얼어 죽을 수도 있겠다.’ 하여 그 사람을 흔들어 깨우다 보니 같이 술을 먹다 나간 친구였다. 옷은 벌써 얼어가고 있고 정신을 잃고 있었다.

지금처럼 병원이 많이 있던 시절이 아니라 황급히 친구를 등에 업고 기숙사로 달음질하여 들어갔다. 옛날 어른들 하신 말씀이 생각나 따뜻한 곳이 아닌 복도에 누이고 젖은 옷을 갈아입혔다.

친구가 깨어나길 기다리다 깜빡 졸고 있는데 친구가 부스스 일어나더니 “어 춥다.” 하면서 방으로 들어간다. 등산용 버너와 코펠에 물을 따끈하게 덥혀주어 먹게 하고 연유를 물었더니 이 친구는 분명히 자기는 술이 받지 않아 그 자리에 있으면 계속 술 세례를 받을 것 같아서 일찍이 숙소로 들어와 잤다는 것이다. 아마도 얼마 마시지 않은 술에도 필름이 끊긴 모양이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친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에 있었던 이야기를 하며 “이제 우리 술 먹는 습성을 고쳐보자”고 제안했다. “우리의 나쁜 습성 때문에 친구 한 명을 잃을 뻔했으니 이제부터는 폭주가 아닌 술을 즐기는 친구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모든 친구는 동의했고 그때부터 친구들의 술 먹는 습성이 변화되었다.

 

  벌써 그 친구들을 만난 지도 40년이 되었다. “술 먹다 죽는 게 소원”이라며 그렇게 술을 많이 마시던 친구들이 60이 가까워지니 서로가 건강을 생각하게 되고, 막걸리는 말술에, 소주는 box로 갖다 놓고 마시던 친구들이 이젠 소주 한 병이 남을 정도로 술을 마시지 않는다.

 

  자식들 이제 철이 들었나 보군. 첫눈 오는 날 너희가 보고 싶다.

출처 : 석란정
글쓴이 : 지슬/박경남 원글보기
메모 :

'석란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어느 수학선생의 고민  (0) 2015.01.31
[스크랩] 낚시  (0) 2015.01.31
[스크랩] 어머님 생신  (0) 2015.01.31
[스크랩] 쾌유하게 하신 하나님.  (0) 2015.01.31
[스크랩] 매형  (0) 2015.01.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