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에서 남양으로 나가는 길목에 '비봉' 이라는 자그마한 면 소재지가 있다.
아마 이 길은 밤이건 낮이건 무심결에 지나친 게 100번은 넘으리라 생각된다.
지난번 정용채 가옥을 방문할 때도 이 길을 지나쳤다.
그렇게 많이 지나다녔으면서도 내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밤색 문화유적 입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남이장군묘’
남이장군묘라면 춘천 가도 가평에 있는 남이섬에 있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남이장군이 남이섬에 있는 인물말고 또 다른 인물이 있겠거니 생각하며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남이섬에 있는 남이장군묘는 가묘이고 비봉면에 있는 묘가 진짜 남이장군묘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언제 시간을 내서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불현듯 생각이 나 차를 몰고 비봉면으로 달려갔다.
내비게이션을 열어놓고 가면서 이정표를 보니 상세하게 안내돼 있어 나름 지자체에서 신경을 썼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비게이션의 안내가 끝난 지점에 눈에 남이장군묘 입구라는 표지석이 들어왔다.
차를 주차하려고 주변을 두리번거려봐도 마땅히 주차할 곳이 없었다. 조금 더 진행하다 보니 차 한 대 주차할 공간이 있어 그곳에다 주차를 하고 카메라를 들고 길을 나섰다.
표지석을 설레는 마음으로 사진을 찍고 보니 주변에 농사를 짓다 버린 비닐 쓰레기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 것을 보게 되었다.
또 묘의 입구는 땅 주인들이 자기 영역을 표시해 놓은 것 같이 철망으로 둘려져 있어 입구는 말 그대로 한사람이 편안하게 출입할 수 있는 공간만 있었다.
조금 올라가다 보니 작은 언덕 구릉에 망주석이 보였다. 주변을 둘러보니 얼마나 허술하게 관리가 되어 있던지 입구 계단인지 아니면 수로를 그렇게 만들어 놓았는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로 비에 휩쓸린 자국들이 있었다. 아마 계단으로 만들어 놓은 공간이 비에 쓸린 모래가 덮는 바람에 수로 아닌 수로가 된 것 같았다.
한때 조선을 호령하던 젊은 장군의 쓸쓸한 무덤을 볼 수 있었다. 능지처참을 당한 병조판서(지금의 국방부 장관)의 무덤이라 할지라도 이젠 세월이 변하고 시대가 변한 지금이라면 선조들의 무덤 정도는 관리하는 게 후손들의 당연한 몫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단으로 조성된 묫자리 위엔 쌍분이 모셔져 있지만, 앞을 관망할 수 없을 정도로 잡목이 무성하게 우거져 있어 답답함을 느낄 수 있었다.
당대에는 반역죄로 능지처참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350년이 지난 순조 18년에 모든 직위가 복원된 병조판서의 묘를 이렇게 버려둔다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사진 찍기에 여념이 없었는데, 문인석을 돌아보는 중에 문인석 귀 한쪽이 떨어져 나간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도 최근에 떨어져 나갔는지 흔적이 선명해 보였다.
또 망주석에 부조되어 있는 다람쥐인지 청설모인지의 머리도 떨어져 나가 있었다.
왼편의 망주석은 마치 피사의 사탑처럼 기울어져 있었다.
내가 갔을 때는 그나마 잔디를 깎아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그다지 잡초가 무성하지는 않았다. 인터넷의 다른 사진을 검색해 보니 그 사진들은 정말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유물유적에 관심을 가지고 돌아다니다 보면 안타까운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우리나라가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작된 지도 벌써 30년(1989년 1월 1일) 가까이 되었다. 나도 그 덕에 외국 여행을 몇 번 가 보았지만, 우리나라보다 더 못사는 나라일지라도 유물유적을 보존하려는 인식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느꼈다.
어느 여행 가이드가 “이 나라 사람들은 조상을 잘 만나 후손들이 편안하게 먹고살게 해 주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우리나라 선조들도 서양의 석조문화의 유물보다는 적겠지만, 화재의 취약한 동양의 목조문화임에도 많은 유물유적을 남겨 주셨음을 우리는 부정하지 못한다. 문제는 우리나라 정부나 지자체나 국민 한사람, 한사람이 그것을 보존하고 관리하여 우리도 잘 보고 배우며 우리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어 있어야겠다.
남이장군을 죽음으로 몰고 간 시 북정가를 음미해 본다.
백두산석 마도진 白頭山石 磨刀盡 - 백두산의 돌은 칼을 갈아 사라지고
두만강수 음마무 豆滿江水 飮馬無 - 두만강의 물은 말을 먹여 없애고
남아이십 미평국 男兒二十 未平國 - 남자 이십 세에 나라를 평안케 하지 못하니
후세수칭 대장부 後世誰稱 大丈夫 -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부르겠는가.
유자광이 모함을 할 때 세 번째 구절의 평(平)을 득(得)으로 고쳐서 “나라를 얻지 못하니”로 모함을 했다고 하니 남이장군의 시를 읽을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다.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하고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였고 북벌로 여진족을 처단하러 가는 길에 이 북정가라는 시를 지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