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란정

[스크랩] 긴장했던 순간 [수필, 삶의 이야기.]

지슬의 세계 2015. 1. 30. 22:11

긴장했던 순간

 

   IMF가 지난 지도 벌써 17년이 넘었지만, 아직 경기가 살아날 기미는 보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올해는 세월호 사건으로 다른 때보다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을 체감으로 느끼고 있는 게 우리들의 실정이다.

  손님은 없지, 가스값은 매월 초가 되면 조정이 되어 새달이 되면 또 어떻게 얼마나 오를까가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다면 두 달이나 가스값이 내림세여서 조금은 여유롭다고나 할까? 날마다 살얼음판을 면키 어렵다. 그래서 택시 일하는 것을 운수업이라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택시 기사들은 손님이 없는 시간이 되면 자기가 좋아하는 지역으로 핸들을 돌린다. 어느 구역에 가면 장거리가 잘 걸린다든가 아니면 그곳에서 손님이 태우면 멀리는 안 가더라도 내리는 곳에서 곧바로 손님을 태울 수 있는 곳을 좋아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그것이 모든 기사에게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과 운 때가 맞았다고나 할까?

  하여간 한 번이라도 좋은 벌이가 생긴 곳을 좋아하고 그곳을 찾아다니는 것이 기사들의 생리이다. 나도 예외가 아니어서 내가 자주 찾아가는 지역에서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데 젊은 연인이 오더니 창문을 두드린다.

  창문을 두드린다는 것은 장거리를 가려고 요금을 흥정하는 일이 태반이어서 창문을 여니 아니나 다를까 안산으로 가려고 하는데 요금이 얼마나 나오는지를 물었다. 내비게이션을 찍어보니 대충 25,000원 정도가 나올 것 같다고 하니 그럼 거기다 1만 원을 더 붙여 줄 테니 아가씨를 잘 모셔달라는 부탁을 하면서 먼저 카드로 결제하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카드영수증을 보면 기사님의 정보를 알 수 있으니 안심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알겠노라고 대답하고 카드결제를 하고 영수증을 주고서 아가씨를 모시고 열심히 목적지인 안산으로 달렸다. 거의 목적지에 다다를 즈음에 그 남자에게서 전화가 왔다. 어디쯤 가고 있느냐며 아가씨가 전화를 받지 않는다고 물어왔다. 운전하며 룸미러로 뒤를 살펴보니 아가씨가 잠이 들어 있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다. 그럼 아가씨를 내려 주면서 자기에게 전화해 달라고 부탁을 했다. 알겠다고 대답을 하고 얼마 안 가 목적지에 도착해 아가씨를 내려 주면서 아까 택시 태워준 그 남자분이 전화해 달란다고 전해주고 기분 좋게 되돌아 나오는 데 전화가 왔다.

  아가씨, 내려 줬느냐며 전화해 달라는 말을 전했느냐고 확인해왔다. 그렇게 했고 아가씨는 알았다고 했다며 조금 기다려 보라고 하며 전화를 끊고 수원으로 복귀하고 있는데 몇 분이 지나기도 전에 또 낯선 전화가 왔다. 이번에는 그 남자가 아니고 경찰이라고 하면서 실종신고가 접수되었다면서 수사에 협조해 달라며 차를 잠깐 갓길에 정차시키라고 했다. 나는 웬일인가 해서 차를 갓길에 주차하고 경찰이라는 사람에게 물었더니 아가씨가 전화를 받지 않아 그 남자가 어찌 된 일인지 불안하다면서 실종신고를 했다고 한다. 어이가 없었다. 여자 손님을 분명 목적지에 내려 드렸고 그 남자가 전화해 달라고 부탁했다면서 말을 분명 전해 줬는데,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경찰은 그 여자의 전화를 추적 중이니까 잠시 운행을 멈추고 기다려 달라면서 전화를 끊었다. 궁금하기도 하고 처음 당하는 일이라 불안하기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번에는 안산시 상록경찰서라면서 전화가 왔다. 그 아가씨가 내린 곳을 정확하게 알려달라고 했다. 수원에서 출발하기 전에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해 놨기에 주소를 불러 줬더니 그 주변에 무슨 건물이나 편의점 같은 게 있느냐고 물어왔다. 편의점은 아니고 앞에 보니까 무슨 슈퍼가 큰 게 있었다고 했더니 잘 알겠다고 하면서 잠시만 더 기다려 달라면서 또 전화를 끊었다. 아마도 경찰은 나를 의심하는 것 같았다. 불안하기도 했지만 불쾌했다.

  그렇게 몇 번의 전화를 더 받고 20분가량을 기다렸더니 수원 서부경찰서에서 전화가 왔다. 그 아가씨 소재를 파악했다면서 수사에 협조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했다. 나는 궁금하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럼 그 아가씨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더니 그 아가씨가 지금 광명시에 가 있다고 했다. 어떻게 광명까지 갔느냐고 했더니 그건 자기들이 알 수는 없고 아마 수원에서 택시를 태워준 남자를 속이기 위해 안산으로 갔다가 거시서 다른 택시를 타고 광명으로 간 것 같다고 했다.

 

  이런 세상에나 그럼 양다리 걸치고 있으면서 그것이 탄로 날까 봐 여러 사람을 긴장하게 하고 자기를 안전하게 태워다 준 나를 이렇게 마음고생 시켰단 말인가? 헛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자유분방한 시대에 살고 있는 젊은이들이라고 하지만 새벽 세시가 넘은 시간에 다른 남자를 만나러 가려고 생쇼를 했다니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난생처음 겪어보는 긴장의 시간,

두 번 다시 겪고 싶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다.

이런 젠장.

출처 : 석란정
글쓴이 : 지슬/박경남 원글보기
메모 :

'석란정'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야화(夜花)  (0) 2015.01.30
[스크랩] 차 한 잔 하실래요?  (0) 2015.01.30
[스크랩] 산수유  (0) 2015.01.30
[스크랩] 끄트머리 가을  (0) 2015.01.30
[스크랩] 찻잔 속에 그대 얼굴이  (0) 2015.01.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