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이야기

이루어진 첫사랑

지슬의 세계 2018. 2. 12. 12:34

 

 

이루어진 첫사랑

 

  어제는 8년 만에 모국을 방문한 고종 사촌 형님과 형수님을 모시고, 수원에 오래 살면서 보고 듣고 공부한 것을 토대로 문화 해설사를 자청하여 수원화성을 함께 여행하였다. 두 분은 1970년대 초 7080세대의 문을 여셨던 보컬 그룹 ‘드래건스’와 여성 보컬그룹 ‘늘 여섯’에서 활약하셨던 분이시다. 20대 초반에 만나 스쳐 지나간 듯한 인연인 줄 알았던 분들이 삼십여 년이 지난 2008년 다시 만나 신혼의 단꿈을 꾸고 계시다는 것을 알았다.

 

  그분들의 사랑 이야기가 2008년 7월 23일 자 국민일보에 실렸던 것을 옮겨본다.

 

  여름이 시작되면서 고국에서 먹던 팥빙수가 생각날 때면 가끔 들르는 한인 타운의 카페가 있다. 아마도 샌디에이고에서 유일하게 팥빙수를 파는 집, 세련된 실내장식의 그곳에 가면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주인 부부가 하얀 유니폼 셔츠 위에 빨간 앞치마를 두른 채 친절히 맞아준다. 유난히 눈웃음이 많은 부인과 부리부리한 모습이 뭔가 범상치 않아 보이는 주인아저씨, 그들에게서 남다른 분위기를 느낀 것은 늘 필요 이상 솟아있는 내 감성 안테나 때문일 것이다.

 

  핫코코아를 사주겠다며 나를 이끈 후배는 “여기 주인분들 30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인 것 아세요? 고 말한다. 알고 보니 타운월보에도 실려 유명한 이야기란다.

  그날 밤 사랑의 해후를 토픽 삼아 나는 여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이슥한 밤 어두운 야외 테이블에서도 얼굴이 빛나던 그녀, 사랑을 쟁취한 사람만이 발산할 수 있는 특유의 해맑음이랄까.

 

  이영주라는 이름의 그녀는 70년대 여성보컬 ‘늘 여섯’의 멤버였고 남편 박명길씨는 록 그룹 ‘드래건스’의 리드싱어였다. 같이 음악의 길을 가며 서로 아껴주었지만, 유난히 여성 팬이 많던 매력적인 보이스의 박명길씨를 이영주는 오빠처럼 따르며 사랑했단다. 그러나 인기 많은 남자를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박명길씨는 다른 여성과 결혼하기에 이른다. 첫사랑을 가슴에 품고 미국으로 건너온 이영주씨는 자신의 노래를 사랑하던 팬과 결혼하여 미국에 정착하고, 그들은 서로의 소식을 모른 채 30년이란 세월을 보냈다.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두 사람, 각자 다른 생을 살아오던 어느 날 기적처럼 미국 땅에서 만났단다. 각기 이혼과 사별의 아픔을 겪은 뒤였다. 이제 결혼 2년 차 신혼인 이들의 스토리가 사뭇 감동적이다.

한밤중 첫사랑 박명길씨의 소식을 전해주던 친구의 전화에 가슴이 막 뛰더라는 이영주씨의 표정은 지금도 첫사랑에 설레는 소녀 같았다. 과연 사랑은 나이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걸까?

 

  하긴 요즘 40, 50대의 주변 여성들과 대화를 나누다 보면 마치 오래 참아오던 숨을 몰아쉬는 것 같은 표정으로 “사랑!” 하고 말해 적잖게 놀라곤 한다. 대상이 있거나 없거나, 젊거나 늙었거나, 사랑은 우리 삶의 영원한 목마름인 모양이다. 주말드라마 속에서, 80대에도 사랑에 가슴 설레는 할아버지를 보며 저절로 미소가 지어지는 것 역시 노년의 사랑도 이해가 갈 만큼 나도 나이 먹은 탓이리라.

 

  끝내 첫사랑을 이루어낸 이영주씨의 행복에 우리 여자 셋은 젊은 날 이루지 못한 사랑을 떠올리거나, 아니면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사랑이란 것에 가슴이 서늘했는지도 모른다. 살아 있는 동안 사랑을 한번은 해보기나 하겠냐고.

 

  신의 사랑이라는 아가페, 친구 간의 사랑인 필레아, 그리고 남녀 간의 에로스, 그중에서도 동서고금을 통해 핫 이슈가 되는 건 에로스다. 사람은 모름지기 신의 사랑만으로, 우정만으로는 살 수 없는 존재인 까닭이다. 아직도 가슴 뛰는 사랑을 남몰래 기다리는 사람들, 그대 가슴에 사랑이 찾아와 꽃을 피우리라! ===박경숙(在美作家)===

 

  6·25 때 부모님을 여의고 누님과 생활하면서 있다가 누님이 미국사람과 결혼하여 도미 후 좋아하던 노래에 빠져 록그룹을 형성해 활동하며 살다 누님의 초청으로 이민 생활하시던 형님. 이혼의 아픔을 겪으면서도 혼자 이국땅에서 딸 아이 하나 키우면서 꿋꿋이 살아오신 형님의 늦은 신혼생활의 단꿈이 오래 가기를 기원해 본다.

'삶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견해차이  (0) 2018.02.12
맑은 영혼  (0) 2018.02.12
퉁소 바위 축제  (0) 2018.02.12
골목 안 풍경  (0) 2018.02.12
이년이 그년  (0) 2018.0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