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 안 풍경
아파트 단지에서 조금 벗어난 우리 동네엔 개인 주택과 자그마한 빌라들이 많이 모여 있다.
주변 환경에 따라 사람들 사는 풍경도 많이 달라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가 보다.
그렇게 살다 보니 아파트 단지와는 다른 게 사람들과의 교류가 많다는 것은 장점이라 할 수 있겠다. 특히 어디 마땅히 갈 곳 없으신 여자 어르신들이 그렇다.
한여름 뙤약볕을 피해 부채를 들고 그늘을 찾던 어르신들이 이젠 햇볕에 나와 가을을 즐기시며 이젠 따뜻한 게 좋아 하신다. 가끔 옆집에 부지런한 아주머니들은 부침개나 도토리묵을 갖다 드리고 어떤 때는 시원한 아이스크림을 사다 드려 어르신들의 칭송을 듣는다.
한 달에 한 번씩 동네 중국집에서 어르신들을 봉양한다고 동네 공원에 자리를 마련해주면 서로 챙겨 가시느라고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며 분주하시다.
자녀들이 모두 출근하고 난 한가한 시간, 할 일이 없으신 어르신 분들이 한 분 두 분 모여들면 어머니는 돗자리를 들고 나가 골목에 깔고 자리를 잡으신다. 이분들이 여기에 모이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귀가 잘 안 들리시니 경로당엔 못 가서 어울리시고 그중에 편안한 우리 집 앞으로 모이신다.
오늘은 무슨 일이 있었고 어제는 무슨 일이 있었다고 저마다 차근차근 이야기하시다 보면 거기서부터 통역이 필요하게 된다. 귀가 잘 안 들리셔서 각기 저마다 할 말씀을 하시니 동문서답하기 일쑤고 어떤 때는 다툼 아닌 다툼이 일어난다. 서로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데 자기 말은 안 듣고 다른 이야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도 우리 어머니는 귀가 잘 들리시기 때문에 통역을 하신다. 이 분이 말씀하시는 것을 저 분이 알아듣지 못하시고 다른 말씀을 하시면 목청을 돋워 말을 전달해야 한다. 그러면 그때야 알아듣고 대답을 하시면 먼저 말씀하신 분은 그새 당신이 말씀하신 것은 잊어버리시고 또 다른 말씀을 하시면 우리 어머니는 아이고 답답해하시면서 또 그 말씀을 전하여준다. 그러다 보니 우리 집 앞 골목엔 진풍경 아닌 진풍경이 벌어지고 목청을 돋워 말씀하시는 우리 어머니 목소리만 들린다.
밤새워 일하고 늦잠을 자다 보면 가끔은 어르신들의 말씀에 잠이 깨곤 하지만 가만히 듣고 있으면 재미도 있다.
나도 느지막이 일어나 운동하러 나가면서 뵈면 으레 하시는 말씀이 당신들 때문에 잠도 못 자고 일어났느냐 시면서 미안하다고 하신다. 아니라고 이제 일어날 때가 돼서 운동하러 간다고 말씀을 드린다.
하루는 할머니들이 무슨 말씀을 하셨는지 운동하고 들어오는 나를 붙드시더니 사진 한 장 찍어 달라신다. 우리가 살면 얼마나 살겠느냐 시며 누구든지 먼저 가면 그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사진이라도 보면 좋지 않겠느냐 신다. 마음이 짠해진다. 작년과 올해 두 번의 큰 수술을 하신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실 줄만 알았다고 하시며, 형님 없으시면 우리가 어떻게 여기에 모일 수 있느냐며 눈시울을 붉히시는 할머니도 계셨다.
또 한 분은 계단에서 넘어지셨는데 허리뼈가 부러지셔서 6개월 넘게 고생하시다 겨우 돌아오시면서 이웃사람들이 기도 많이 해주셔서 죽지 않고 살아 돌아왔다. 시며 쓸쓸한 웃음을 지어 보이신다.
이젠 우리나라도 노령화 사회를 지나 노령사회로 접어든 지금. 집 있고 돈 있는 사람들도 그들 나름대로 고민과 문젯거리가 있겠지만, 이 골목에도 문제와 고민이 많이 있다.
자식이 돈 벌 생각은 안 하고 매일 술이나 먹고 다니니 부인이 못 살겠다고 아이들 버리고 재가한 며느리를 둔 할머니도 계시고, 아들과 며느리가 합세하여 매일 구박하기에 집에 들어가기 싫다고 하시며 길옆에 박스를 깔고, 덮고 주무셨다는 할머니도 계신다.
그러나 지금처럼 노인들이 모여 정담을 나눌 수 있는 곳이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우리 집 앞 어르신들이 돌아가시는 날까지 아무 탈 없이 우리 어머니 말씀대로 잠자다 아주 갔으면 좋겠다고 하신 것처럼 고생하지 않으시고 편안하게 주무시다가 하늘나라로 가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할머니! 잠 못 자도 좋으니 제 걱정 하지 마시고 오래오래 우정 변치 말고 행복하게 사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