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백제의 부활을 꿈꾸었던 취리산 회맹지 안내판 하나 없이 비석 하나만 달랑 서 있는게 패자의 말로를 보는 것 같았다.
664년 2월 신라측의 김인문(金仁問)·김천존(金天存)이 웅진에서 부여 융을 만나 유인원의 참여 속에 회맹하였다. 그러나 이는 회맹에 앞선 예비회담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뒤 665년 8월취리산에서 유인원이 입회한 가운데 신라측의 문무왕 및 여러 대신과 백제측의 웅진도독 부여 융 사이에 회맹이 이루어졌다.
회맹은 중국 고대의 방식을 따라 이곳에 단(壇)을 쌓고 백마를 죽여 하늘과 땅의 신 및 산천의 신에게 제사한 후 그 피를 회맹인들의 입에 발라 맹세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졌다. 맹세하는 글(盟文)은 유인궤가 지었는데, 내용은 신라와 백제가 영원한 우방으로서 형제처럼 화친하겠다는 것이었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회맹단지 비석 주변은 오씨 집안 묘군들로 들어차 있다.
오씨 문중은 해마다 춘향제의 격식을 갖추고 많은 문중 사람들이 모여 큰 행사를 치룬다고 한다.
역사야 어찌됐건 후손들이 잘 살아야 문중이 멸시를 당하지 않는다는 교훈을 주는 것 같다.
아직 알려지지 않은 문화유적을 찾아 가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세계에서 으뜸가는 내비가 있다고 하여도 문화유적에 대해서는 많이 인색한 것 같다. 유물유적에 조예가 깊은 선배가 없었다면 아마 구경도 하지 못했을 것 같다.
천정대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다.
* 백제 때 제상을 선출하던 곳, 천정대 *
백제 때 재상을 선출하던 곳으로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窺岩面) 호암리에 있다. 면적은 257,356㎡로 고대부터 신성시하던 곳이다. 백마강을 1.5㎞ 거슬러 올라가면 범바위라는 바위가 있는데, 이곳에서 동북쪽에 임금바위 또는 신하바위라고 부르는 바위들이 있는 곳이 천정대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보면 호암사(虎岩寺)에는 정사암(政事岩)이란 바위가 있는데, 나라에서 재상을 뽑을 적에 후보자 3, 4명의 이름을 적어 함봉(函封)하여 이곳 바위 위에 두었다가 열어보아, 이름 위에 도장이 찍혀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있다. 산 아래 서편 강변에 있는 동리가 바로 호암리이며 그곳에는 백제의 호암사터가 남아있다. 절벽 아래에는 임금바위,신하바위라 불리는 솟은 암반이 있다. 이 바위 위에서 임금과 신하가 각기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원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이같은 전설과 기록은 천명(天命)을 중히 여기고 그것을 받들어 정치를 베풀었음을 뜻한다. 부족사회(部族社會)로부터의 유습(遺習)이 백제 때에도 재상의 임명, 국가 중대사의 결정 등에 이용되고 있음을 알리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천정대란 현판이 걸려 있으나 복원한지는 얼마 되지않은 것 같다.
* 천정대의 문화적 의의 *
천정대에서 임금과 신하가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기원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는 것으로 보아 천명을 중히 여기고 이를 받들었음을 뜻한다. 또한 《동국여지승람》에는 “천정대라고 하며 현북10리에 있는데, 江北絶壁 有岩如臺 下臨江水”라고 그 위치와 경관을 설명하였는데, 이는 국가의 중대사를 논의할 때 자연 경관도 신중히 고려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천정대 자리가 산 정상에 있고 또한 침식작용을 많이 받는 바위이므로 남아 있는 유구가 없어 전모를 확인할 수 없으나 주변에서 백제시대의 연화무늬 와당과 기와조각이 출토된 적이 있다.
저 아래 내려다 보이는 강이 금강이다.
출처 : 대한민국 구석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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