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하던 원치 않았던 경기일보를 보다보니 경기도에 있는 고적문화를 소개하는 코너가 있어 관심 있게 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만안교에 대한 기사가 두 번이나 계속 보도가 되어 찬찬히 읽어보니 가까운데 있어 보고 싶은 마음에 아내와 짧은 시간을 내 다녀왔다.
부부가 같은 취미를 가진다는 것은 생활에 활력을 주고 서로를 배려하며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경기일보 기사를 그대로 옮겨 본다.
즉위한 지 13년이 되던 1789년, 정조는 오랜 숙원을 풀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양주 배봉산에서 조선 최고의 명당으로 알려진 수원 화성으로 이장하고 자급자족의 신도시 화성을 건설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정조는 매년 현륭원을 참배했다. 당초의 참배행렬은 창덕궁을 떠나 용산에서 배다리로 동작나루를 건너 남태령을 넘고 과천과 인덕원을 거쳐 지지대고개를 넘는 길이었다.
그러나 과천의 노정길에 사도세자의 처벌에 참여한 김상로의 형 김약로의 묘가 있으므로 불길하다하여 노량진에서 시흥, 안양, 수원의 새로운 행로를 만들면서 이곳 안양천을 경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사실 이보다는 과천길에 남태령이라는 가파른 고개가 있어 겨울철에 오가는데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새롭게 길을 개척했다는 주장이 더욱 설득력이 있다.
아무튼 처음에 나무로 다리를 놓아 왕의 행렬이 지날 수 있도록 했으나 1795년(정조19) 경기관찰사 서유방이 왕명을 받들어 3개월의 공역 끝에 돌다리를 완성했다. 교량의 규모는 길이 31.2m에 너비 8m인데 실용성이 돋보인다. 가로로 열두 명의 병사가 지날 수 있고, 말을 탄 다섯 기병이 나란히 지나 갈 정도로 넓은 이 다리의 바닥은 대청마루를 엇물려 짠 것처럼 화강암 판석과 장대석을 정교하게 깔았다.
원래는 현재 위치로부터 남쪽 200m 지점에 있었던 것인데 1980년 8월 국도를 확장하면서 이곳으로 옮겼다. 아무튼 정조가 행차하던 이 원행길은 훗날 1번 국도가 되고, 수원을 거쳐 삼남으로 연결되는 철도도 이 길을 따라 났다.
정조는 원행을 ‘행행(行幸)’이라 선언했다. 곧 행복한 나들이라는 뜻이다. 정조의 뜻대로 원행길에서 많은 일들이 이루어졌다. 어가를 호위하는 5군영 군사들의 진법훈련도 길 위에서 벌어졌다.
만안교 남쪽 측면에 축조 당시에 세운 비석이 서 있다. 만안교비는 높이 164cm, 너비 64cm, 두께 34cm이다. 1795년에 건립된 만안교비는 서유방(徐有防, 1741~1798)이 비문을 짓고, 명필 조윤형(曹允亨)이 본문 글씨를 썼다. 비석 전면의 ‘만안교’라는 큰 글씨는 예서의 대가 기원 유한지(兪漢芝, 1760~1834)의 작품이다. 공사를 지휘 감독하고 비문을 지은 서유방은 그 형인 서유린(1738~1802)과 함께 정조의 최측근이었다.
1795년 9월, 경기감사 서유방이 안양천에 석재로 만안교를 착공하여 3개월 만에 완공했다. 이 만안교는 현륭원 부근 황구지천에 놓았던 대황교와 함께 원행 과정에서 축조된 석교이다. 잘 닦여진 신작로 ‘시흥로’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서울과 수원을 잇는 육상 교통의 대동맥으로서의 구실을 수행하고 있다.
원행은 농사철을 피해 농한기인 겨울철에 이루어졌다. 겨울철 눈 쌓인 험한 남태령 고개를 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얼어붙은 길을 닦으려면 수고도 배로 들었다. 해당 고을의 수령들에게 대안을 마련하도록 어명이 하달되었다. 새로운 길을 어디로 내면 좋을 지 살펴본 수령들은 시흥로가 편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이런 논의 과정을 거쳐 시흥로는 화성 성역이 착공된 지 2개월 째 접어든 1794년 4월에 개설되었다.
만안교는 아치를 사용한 홍예교(虹蜺橋)로 다리 밑에는 박석을 깔아 물의 흐름이 거세도 다리가 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였고, 다리 기둥의 끝도 물의 흐름에 따른 마찰을 줄이도록 마름모꼴로 하였다. 위로는 장대석(長臺石)을 깔아 사람과 짐이 지나다니는 길을 만들었다.
1797년 1월 말, 만안교에 도착한 정조가 다리를 건설할 때 감독한 신형을 어가 앞으로 불러 성명을 아뢰게 하고, 새롭게 건설한 다리가 잘 되었다며 칭찬했다.
7개의 홍예는 하단부터 곡선을 그어 전체의 모양은 반원을 형성하고 있다. 또한 홍수가 져도 바닥이 파이지 않도록 시내 바닥에 반반하게 다듬은 판석을 넓게 깔았다.
만안교는 임금의 행차가 편안하기를 비는 마음에서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그렇다면 조선후기의 대표적인 홍예석교로 평가받고 있는 이 다리를 건설한 주역은 누구일까. 경기감사 서유방의 공로는 알려진 것이지만, 실제로 공사를 감독한 주역은 따로 있다. <승정원일기>와 <일성록> 등의 기록을 통해 확인한 인물은 평안도 안주에서 차출되어 온 무관 신형(申泂)이다.
아울러 백성들의 불편을 조금이라도 위로하고자 ‘격쟁’을 허락했다. 꽹과리를 두드려 억울함을 호소하는 격쟁은 왕과 백성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꽹과리를 쳐 원통한 일을 고하면 왕이 즉시 문제를 해결해 주었다. 재위 24년 동안 1천335건의 격쟁 처리했다. 백성들이 행복한 행차가 되어야 한다는 정조의 신념이 만들어낸 특별한 행사였다. 이처럼 백성들에게 다가가려는 정조의 노력으로 13번의 원행길은 큰 원성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다. 아버지를 위한 정조의 효심은 고을과 고을을 잇는 신작로로, 신도시 화성의 건설로 결실을 보았다.
백성들은 장용영과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 병사들의 실전을 방불케 하는 일사불란한 훈련을 지켜보았다. 백성들에게는 흥미로운 구경거리이지만, 군사들에게는 행군과 훈련이 동시에 실시되었던 것이다. 병사들에게도 원행이 끝나면 무예를 시험보아 부상을 넉넉하게 주어 격려했다.
793년 (정조 17년) 정조는 수원의 현륭원에 나아가 작헌례를 하면서 처음으로 새로 닦은 길을 지나게 되었다. 만안교 자리에 처음 놓인 다리는 나무로 된 것이었다. 나무 다리가 불편하여 경기도 관찰사 서용보가 돌다리를 놓고자 하였으나 윤허를 받지 못하였다. 1795년(정조 19년) 경기도 관찰사 서유방은 돌다리를 만들라는 어명을 받고 3개월에 걸쳐 만안교를 축조하였다.
<승정원일기>를 보면, 1797년 2월 1일자로 신형을 청성 첨사로 삼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덧붙여 기억할 사람은 안양의 백성들이다. 관악산과 삼성산 자락에 화강암이 많고 석공도 많아 석수동이란 지명이 생겼다는 설화가 전해진다. 그렇다면 만안교와 만안교비도 이 석공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출처 : 경기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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