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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혜령군의 신도비(神道碑)와 묘표(墓表)

지슬의 세계 2016. 3. 26. 12:55

신도비 (神道碑)

 

죽은 사람의 평생사적(平生事蹟)을 기록하여 묘 앞에 세운 비.

 

[내용]

장사(葬事)에서 비를 많이 세우는 제도가 있었으며, 진한(秦漢) 이래 죽어서는 공업(功業)이 남았고 살아서는 덕정(德政)이 있는 자는 모두 돌로 비를 세웠다.

신도비의 제도는 중국에서 진송(晉宋, 5세기초) 때 비롯되어 천자 및 제후들이 모두 신도비를 세웠다. 처음에는 그 각문(刻文)이 다만 모제(某帝)’ 혹은 모관신도지비(某官神道之碑)’라고 하였다.

신도비를 묘의 동남쪽에 세우게 된 것은, 지리가(地理家)의 말에 따르면 동남쪽을 신도라 하기 때문이다. 후한(後漢) 때에는 묘 앞에 길을 트고 석주(石柱)를 세워 표하였던 것을 신도라 칭하였으나, 진송 이후 비각(碑刻)하게 되었다.

우리나라의 신도비는 조선시대 왕릉의 신도비로서 태조의 건원릉신도비(建元陵神道碑)와 세종의 영릉신도비(英陵神道碑)가 있다. , 사대부의 신도비는 웬만한 위업과 공훈을 세웠거나 도덕과 학문에 투철한 자들의 묘 앞에 7, 8()되는 큰 비가 서 있어 이수(螭首귀부(龜趺)의 위용을 보인다.

, 조선시대 이후 관직으로 정2품 이상의 뚜렷한 공업과 학문이 뛰어나 후세의 사표(師表)가 될 때에는 군왕보다도 위대할 수 있는 일이라 하여 신도비를 세워 기리도록 하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사대부의 신도비는 그 수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출처 한국민족대백과사전

혜령군 신도비(좌측)

혜령군 신도비(우측)

좌측에 있는 신도비를 받치고 있는 거북 모양이 특이하다. 왕손이어서인지 거북과 용의 모양을 합쳐놓은 것 같다.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으며 발도 거북의 발이 아닌 용의 발을 형상화 했다.

 

 

 

반면 우측에있는 신도비 받침은 여느 받침석과 마찬가지로 거북모양을 하고 있다.

 

 

 

묘표(墓表)

 

무덤 앞에 세우는 푯말이나 푯돌.

묘표는 후한 안제(安帝) 원년(114)알자경군묘표(謁者景君墓表)를 세운 데서 비롯된다. 묘표는 비갈처럼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제한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관직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세울 수가 있다. 신도(神道)에 세우는 신도표(神道表)도 성격은 묘표와 같다.

우리나라에서 묘표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기 이곡(李穀)이군묘표(李君墓表)를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 뒤에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점차 성행해오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묘표의 체재가 정착을 한다. 그 문집에 수록된 묘표는 무려 240여 편에 이르고 나름대로의 법이 창출되어 후일 문인들의 금석문의 정례(定例)가 되었다

 

[개설]

문체가 비갈(碑碣)과 비슷하다. 천표(阡表빈표(殯表영표(靈表)는 모두 뜻이 다르지만 명대(明代) 이후로는 모두 합쳐 묘표라 부른다. 천표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표석이고, 빈표란 장사지내지 않았을 때 세우는 표석이며, 영표란 처음 사람이 죽었을 때 세우는 표석을 이르는 말이다.

 

[연원 및 변천]

묘표는 후한 안제(安帝) 원년(114)알자경군묘표(謁者景君墓表)를 세운 데서 비롯된다. 묘표는 비갈처럼 신분이나 계급에 따른 제한을 받지 않는다. 따라서 관직의 고하에 관계없이 누구나 세울 수가 있다. 신도(神道)에 세우는 신도표(神道表)도 성격은 묘표와 같다.

우리나라에서 묘표를 세우기 시작한 것은 고려 말기 이곡(李穀)이군묘표(李君墓表)를 지은 데서 비롯된다. 그 뒤에 조선조에 접어들면서 점차 성행해오다가 송시열(宋時烈)에 이르러 묘표의 체재가 정착을 한다. 그 문집에 수록된 묘표는 무려 240여 편에 이르고 나름대로의 법이 창출되어 후일 문인들의 금석문의 정례(定例)가 되었다.

 

[내용]

()란 본래 표양(表揚)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엄격한 시비선악을 판단하여 결정하는 포폄의식(褒貶意識)에 의거하여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찬자는 죽은 이의 방명(芳名)을 후대에 유전시키려는 것이 사명이다. 따라서 객관적 시각에서 한 개인의 진실한 삶의 모습을 제시하려는 사관의 열전(列傳)과는 다르게 긍정적인 측면에서만 기술하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묘표는 한정적 공간에 글을 새겨 넣어야 하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내용의 골자만을 수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와 같은 압축적 표현과 생략수단에 의하여 형태면에서 표현기교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내용면에서는 자료적 가치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묘표도 묘갈과 같이 서사(敍事)를 위주로 하는 정체(正體)와 의론(議論)을 위주로 하는 변체(變體)가 있다. 묘갈은 명을 끝에 붙이는 것이 상례로 되어 있으나 묘표는 대체로 명을 붙이지 않는 것이 상례이며, 경부(輕浮)한 말이나 문식(文飾)을 금기로 하고 있다.

묘표의 중요내용으로는 죽은 이의 성명·자호·관향·선조·현조(顯祖부모·생졸연월일··자녀·손증의 선계 손록과 죽은 이의 행적, 찬자의 송사(頌辭), 묘소, 찬자의 성명 등이 수록된다. 그러나 찬자에 따라서 기술하는 순서가 다르다.

 

한문학 문체의 이름으로도 쓴다. 중국 후한 때인 114(안제 1) 알자경군묘표(謁者景君墓表)를 세운 것이 처음이다. 비갈과 비슷하지만, 비갈과는 달리 신분과 계급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종류는 천표(阡表빈표(殯表영표(靈表) 등이 있다. 천표는 무덤 앞에 세우는 표석이고, 빈표는 장사를 지내지 않았을 때 세우는 표석이며, 영표는 처음 사람이 죽었을 때 세우는 표석으로 명나라 이후에는 모두 묘표라고 불렀다.

한국에서는 고려말 이곡(李穀)이 이군묘표(李君墓表)를 지은 것이 묘표의 처음으로 알려져 있는데, 조선 중기에 와서 성행했으며 특히 송시열(宋時烈)의 문집에는 240여 편의 묘표가 수록되어 있다. 뒤에 문인들에 의해 금석문의 정례(定例)가 만들어졌다.

묘표도 비갈과 마찬가지로 죽은 이의 긍정적인 면만을 쓰는 특징을 가졌으므로 내용의 자료적 가치는 적었다. 또 한정된 공간에 글을 써넣어야 했기 때문에 쓰고자 하는 내용의 뼈대만을 서술해야 했다. 대체로 묘갈이 끝에 명을 붙인 데 비해 거의 명이 붙지 않으며, 가벼운 말이나 실속없이 겉만 꾸미는 일은 피했다. 쓰는 이에 따라 순서가 달랐지만 대개 죽은 이의 이름·자호(字號본관·조상·부모, 출생과 사망 연월일, 살아 있을 때 한 일, 쓴 이의 송사(頌辭), 쓴 이의 이름 등을 적었다.묘갈, 묘비   

 

출처 다음 백과사전

 

신도비나 묘표는 당대에 유행했던 서예필체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혜령군의 묘표

혜령군의 아들 예천군 묘표

혜령군의 손자 축산군의 묘표

총알자국 같은 것으로 많이 훼손됬지만 축산군의 묘표로 확인되었다.

축산군의 묘소와 묘표는 연천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모셔와 할아버지, 아버지와 함께 안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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