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의 이곳저곳 역사탐방

축만재와 항미정

지슬의 세계 2018. 6. 1. 04:17

농촌진흥청 북서쪽 여기산(麗妓山) 밑에 있는 저수지로, 수원 화성의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西湖)라고도 불린다. 현재는 농촌진흥청의 시험답(試驗畓)과 인근 논의 관개용 수원 및 시민들의 쉼터인 서호공원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기도 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축만제의 축조연대는 1799(정조 23)으로 당시로서는 최대 규모로 조성된 관개 저수지이다. 수원성을 쌓을 때 일련의 사업으로 내탕금 3만 냥을 들여 축조하였다고 한다. 당시 정조는 수원성의 동서남북에 네 개의 호수[四湖]를 축조하였다.

북지(北池)는 수원성 북문 북쪽에 위치한 일명 만석거(萬石渠)를 말하는 것으로 1795년에 완성한 속칭 조기정방죽을 가리킨다. 또한 남지(南池)는 원명 만년제(萬年堤)라 하여 1797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시설한 것이다. 그리고 동지는 수원시 지동에 위치하였다고 하나 현재는 형체를 알 수가 없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표석이 현재 전해지고 있다.

보수관리는 축제 후 4년만에 축만제둔(祝萬堤屯)을 설치하여 도감관(都監官감관(監官농감(農監) 등을 두어 관수와 전장관리를 맡게 하고, 이에서 생기는 도조는 수원성의 축성고(築城庫)에 납입하였다는 것을 보면 제방 아래 몽리구역(물이 들어와 관개의 혜택을 받는 곳)의 농지는 국둔전(國屯田)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축만제의 규모는 문헌상 제방의 길이가 1,246(), 높이 8, 두께 7.5, 수심 7, 수문 2개로 되어 있다. 제방에는 제언절목(堤堰節目)에 따라 심은 듯 아직도 고목들이 서있다.

고목들도 늙었는지 철 단장을하고 있는데 철파이프가 녹이슬어 새롭게 페인트 칠을 하고 있다.

1831년 화성유수 박기수는 축만제 남쪽에 풍광이 아름다운 항미정(杭眉亭)을 지었고, 이곳에서 바라보는 서호낙조’(西湖落照)는 수원팔경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명소가 되었다.

우리나라 사람들도 문화재를 보호하려는 마음은 별로 없것 같다 작년에 왔을 때는 학생들이 정자 마루에 올라가 앉고 눕고 하더니 올해는 어르신이 누어 계셨다. 그 옆에는 올라가지 마시오라는 팻말이 있는데 ~~~~~아마 한글을 모르는 건 아니겠지?

항미정은 1908년 조선 마지막 황제인 순종이 융·건릉을 방문하고 돌아갈 때 잠시 쉬어간 정자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앉았다 누었다 하시는 어르신을 빼고 담으려니 앵글 각도가 안나온다. 젊은 사람이라면 한마디 하겠는데~~~

한옥은 언제 봐도 멋있다. 마치 한복을 입은 여인네 처럼 단아하다고 할까?

이쪽 옆에서 찍고 저쪽 옆에서 찍고 나 혼자만의 재미에 빠져 있다.

이와 같은 축만제의 역사적 배경과 중요성은 세계적으로도 인정받아 201611월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국제관개배수위원회(ICID) 67차 집행위원회에서 세계 관개시설물 유산으로 국내 최초 등재되었다.

요즘 비가 자주와서 그런지 물줄기가 세차게 떨어지고 있다.

서호 방죽과 연결되어 있는 둘레길은 언제 봐도 한가롭고 여유를 주는 것 같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에 권업모범장을 설치하여 농사의 중요성이 계속 강조되어 왔고, 이후 서울대학교 농과대학과 농촌진흥청이 설치되어 그 맥을 이어왔으나, 현재는 서호공원으로 시민들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소나무 수형이 운치있고 멋있어 보인다.

축만재 한가운데는 축만재를 만들때 퍼낸 흙으로 인공섬을 만들었다고 한다.

사람들의 발길이 닿지 않으니 철새들이 많이 찾는다. 먹을 것이 풍부하고 인적이 없으니 철새들에게는 천국과 같다.


나뭇가지마다 마치 열매가 달린 것처럼 새들이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다.

물가에도 새들이 많다 민물가마우지들이 많다.

작년엔 붕어를 물고  나오는 것을 담았는데 올해는 별로 성공하는 장면을 못봐 아쉬웠다.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부분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