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일이 있어 봉담을 지나가다 길 안내판을 보니 최루백 길이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최루백 길? 사람의 이름을 딴 길이라는 생각이 들어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최루백이라는 효자가 있었다고 검색되었다.
혹시나 내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을까? 하여 내비를 검색해보니 역시나 내비에는 없었다.
다시 인터넷 이곳저곳을 검색하다 보니 어느 분의 블로그에 주소가 있었다.
내비에 주소를 검색하니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수원 최씨 사적지라는 커다란 돌비가 길 안쪽에 보였다. 오른쪽으로 돌아 들어가니 두개의 비각이 보였다.
최루백이란 인물은 고려의종 때 문신인으로
최루백의 효행은 『고려사』「열전」, 『세종실록』「지리지」, 『삼강행실도』,『동국여지승람』, 『오륜행실도』, 뿐만 아니라 중국의 『해동금석원』에도 실려 있을 정도로 널리 알려져 있다.
최루백의 나이 15세 때 수원의 호장으로서 평소 사냥을 즐기던 그의 아버지 최상저가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히었다. 그러자 최루백은 “자식 된 도리로서 어찌 아버지의 원수를 갚지 않고 견딘단 말씀입니까”라고 하면서 어머니의 만류를 뿌리치고 도끼를 들고 단신으로 산에 올랐다.
호랑이의 자취를 더듬어 가던 중 아버지를 잡아먹고 배가 불러 누워 있는 호랑이를 발견하였다.
최루백은 그 앞으로 달려가 “네 어찌 하늘같이 받들고 있는 나의 아버지를 해쳤느냐,
내 너를 잡아먹어야겠다. 고 꾸짖었다. 이 말에 호랑이는 꼬리를 흔들면서 납짝 엎드리는 것이었다.
이때 최루백은 도끼를 들어 호랑이의 머리를 내리치고는 호랑이의 배를 갈라서 아버지의 뼈와 살을 꺼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서 아버지의 뼈와 살을 정결한 그릇에 담아 홍법산(弘法山) 서쪽 기슭에 안장을 하고 무덤 곁에 여막을 짓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다. 최루백이 시묘살이를 하던 어느 날 잠이 잠시 들었는데 아버지의 혼령이 나타나 다음과 같은 시를 읊고 사라졌다.
"가시 덩굴 헤치고 효자의 여막에 이르니
마음 속 느끼는 것이 많아 눈물이 그치지 않네
흙 져다가 날마다 무덤 위에 얹으니
이 뜻 아는 건 밝은 달과 맑은 바람뿐이네.
살아서 잘 봉양하고 죽어서 지켜주니
그 누가 효의 처음과 마침이 없다 하리요 "
비각은 팔각지붕의 한식 골기와를 얹은 겹처마집이며 기둥은 원주형 목주로 1969년 3월에 중건되었다.
후에 정조가 화산 아래 수원구읍치에 현륭원을 천장하면서 융릉 남쪽에 있던 효숙공 최루백의 비각을 서남쪽 홍범산 기슭으로 옮기고 최루백이 태어난 마을을 효자동으로, 호랑이를 잡은 뒷산의 큰 바위를 효암이라 명명하고 그의 자손에게 부역을 면해 주었다고 한다.
현재 수원최씨 사적지에 보존되어 있는 최루백의 효자비는 조선 숙종 때 세워진 것으로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비석의 앞면에는 ‘高麗孝子翰林院學士崔屢伯之閭’라고 새겨져 있다.
비각 창살이 너무 좁아 폰카로 비문을 찍으려 애를 썼지만 제대로 된 사진을 얻을 수 없었다.
비각 뒤쪽에는 최루백의 아버지인 최상저의 유허비 비각이 건립되어 있다.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어차피 이런 비각을 통해 후손들에게 교훈을 주고 집안의 자랑거리로 삼으려 한다면 내부를 좀 더 쉽게 볼 수 있도록 여유 있는 공간이 있었으면 사진이라도 편하게 찍어 나처럼 블로그활동 하는 사람들에 의해 알려진다면 좋을 것 같다.
akspy블러그 부분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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